몸을 얻은 기척
-표면보다 먼저 온 것들 (2026)
서지인
어떤 표면은 오래 걸어온 사람의 얼굴을 닮아 있다.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조용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나온 시간이 군데군데 접혀 있다. 손에 오래 쥐어진 돌의 모서리, 비가 자주 들이친 벽의 얼룩, 한 계절을 넘긴 흙의 굳은 결. 그런 것들은 자신의 이력을 길게 말하지 않는다. 다만 말없이 남아, 우리가 그 시간을 더듬게 한다.
이은우의 조각 앞에 서면, 나는 먼저 그 조용함을 본다. 하지만 그 조용함은 정지라기보다 먼 곳에서 막 도착한 기척에 가깝다. 한때 안쪽에서 무언가 부풀었을 것이다. 서로 다른 덩어리들이 밀려들고, 엉키고, 서로를 삼키며 하나의 몸을 이루었을 것이다. 어떤 부분은 넘쳤고, 어떤 부분은 눌렸으며, 어떤 부분은 깎여 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이 지나간 뒤, 지금의 표면이 남았다.
결과라고 불리는 표면이 우리에게 도달하기까지, 물질은 얼마나 많은 모양을 지나왔을까. 아직 이름 붙기 전의 덩어리들. 서로의 경계를 모른 채 부풀어오르던 몸들. 한순간 가까워졌다가 다시 밀려난 결들. 작가의 손은 그 사이를 통과했을 것이다. 밀고, 뭉치고, 덜어내고, 기다리고, 다시 파고들며. 그 손길 사이에서도 물질은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자라나고, 예기치 못한 표정을 먼저 내밀었을 것이다.
그때 조각은 만들어지는 동시에 생겨난다. 나는 이 모순처럼 보이는 순간이 이은우의 작업을 가장 멀리 데려간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의지로 시작되었으나, 그 의지의 바깥으로 조금씩 번져가는 것. 어떤 질서가 놓였으나, 그 가장자리에서 스스로 다른 길을 내는 것. 하일로 코스모스라는 이름은 아마 그 사이의 희미한 기후를 부르는 말일 것이다. 질료와 질서가 서로의 몸속으로 들어가 잠시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시간. 이 세계에서 형상은 명령보다 기척에 가깝다. 그것은 어느 정도 놓이고, 어느 정도 놓쳐진다. 안쪽에서 부풀어오르는 힘은 바깥의 손과 만나고, 손은 그 힘을 더 깊은 곳으로 밀어 넣는다. 그래서 이은우의 표면에는 이상한 이중의 시간이 남는다. 금방 벌어진 일처럼 생생하면서도, 아주 오래전부터 마모되어 온 것처럼 낡아 있다. 방금 잘린 단면처럼 납작하지만, 그 안쪽에는 오래된 지형의 숨이 눌려 있다.
나는 그 표면에서 고바위의 시간을 떠올린다. 비가 지나가고, 바람이 스치고, 계절이 여러 번 몸을 바꾸는 동안 조금씩 둥글어지는 오래된 바위. 누구도 그 변화를 하루에 볼 수 없지만, 어느 날 그것은 이미 다른 얼굴이 되어 있다. 이은우의 조각은 그 느린 시간을 한꺼번에 감아 올린 것 같다. 억겁의 마모가 빠르게 지나가고, 사라진 부피들이 한 장의 표면 안으로 접혀 들어간다. 과격한 시간은 소리를 잃고, 남은 것은 조용한 얼굴이다. 그래서 이 표면의 서정은 가볍지 않다. 많은 충돌을 지나 조용해진 표면이다. 뒤섞임은 깊이 가라앉고, 절단은 가장자리의 결로 남고, 사라진 덩어리들은 보이지 않는 무게가 된다. 격렬했던 일들은 표면 아래의 낮은 곳에 머문다. 그곳에서 조각은 천천히 빛을 받는다. 여기서는 보이지 않던 세계가 계획도 계산도 닿지 않는 순간들을 지나, 잠시 몸을 얻는다. 아직 이름을 갖지 못한 형상들이 한때의 질서 속에서 서로를 지나치고, 우연히 하나의 얼굴로 머문다. 하일로 코스모스의 형상들은 그렇게 잠깐 나타난다. 완성의 표정보다 도착의 숨을 가진 채로.
우리는 그 앞에서 하나의 물체를 본다. 그러나 조금 더 오래 머물면, 그 물체가 지나온 공기의 시간도 함께 보인다. 부풀어오르던 순간의 압력, 서로에게 들러붙던 어둠, 깎여 나간 자리의 얇은 빛, 남겨진 면의 낮은 떨림. 표면은 안쪽에서 일어난 일들이 마지막으로 닿은 자리다.
이은우의 조각은 오래된 사물들처럼 조용히 놓인다. 그러나 그 조용함 안에서 세계는 아직 끝나지 않은 듯하다. 무언가 계속 부풀고, 섞이고, 멀어지고, 다시 한 겹의 표면으로 돌아온다. 이미 도착한 것과 아직 도착 중인 것이 같은 자리에 머무는 시간. 그 사이에서 조각은 잠시 하나의 얼굴을 얻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얼굴을 바라보며, 물질이 지나온 길을 뒤늦게 상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