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길은 착종의 운동성을 담는다: 이은우 허내훈, 《아마도 이쪽입니다, 고라니씨.》

콘노 유키 (미술비평)

모든 길은 어딘가로 이어져 있다는 일반적인 상식에는 간과하기 쉬운 사실이 있다.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은 동물이 지나가는 길과 인간의 길을 비교하면서, 후자를 운동을 응집하여 시작과 끝이 담긴 이미지로 고정한다고 설명한다[1]. 동물이 지나가는 길은 인간의 길처럼 시작점과 출발점을 잇는 모양새를 갖기 힘들다. 어쩌면 자연은 끊임없는 흐름 또는 쪼개짐 안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만든 길은 이러한 제약을 극복하는 수단이다. 도로는 한 장소와 한 장소를 연결하며, 다리는 공간적인 분리를 극복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통로로 기능한다. 길이 놓이면서 하나의 점과 다른 점을 이어줄 때, 흐름은 일직선으로 통합된다. 

이은우와 허내훈이 《아마도 이쪽입니다, 고라니씨.》(영은미술관, 2025)를 구상하게 된 계기도 우리 인간에게 익숙한 길 위에서였다. 운전 중에 우연히 목격한 ‘생태통로’가 이번 전시의 출발점이 되었다. 생태통로는 야생동물이 지나가는 용도로, 도로 위에 육교처럼 지은 인공의 길이다. 이 길을 세운 목적은 사실상 로드킬을 방지하기 위함인데, 실제로는 본래 목적을 잃어 방치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길의 출발점과 목적지가 인간처럼 명확하지 않은 동물에게, 이 인공의 길은 애초에 적합하지 않은 물건이었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이 다리는 어디로 이어져 있을까? 모든 길은 어딘가로 이어져 있다는 상식이 간과하는 또 다른 사실은, 운동이 응집될 때 추상적 개념만큼 쓸모가 있는—고로 없는—것도 없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 다리는 분명 ‘현재’에서 출발하여 ‘미래’로 이어져 있다. 그런데 이 ‘미래’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자연이 울창하지만 동물들이 지나가지 않는 생태통로가 향하는 곳이 인간 또는 자연의 미래라면, 사실 이 길은 일직선보다 착종된 이미지로 나타나지 않을까. 이은우와 허내훈이 목격한 생태통로는 인간과 자연의 교차로이자 지금과 미래, 현실과 허구가 정면충돌하는 곳이었다. 

미술 작품 또한 다리라면, 그것은 “잠깐, 이쪽입니다”라고 말을 걸어 발걸음을 멈춰 세운 후, 인간과 자연의 연결과 관계를 살펴보도록 해 준다. 《아마도 이쪽입니다, 고라니씨.》의 출발점이 된 ‘생태통로’를 작품 소재로만 본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이은우와 허내훈의 전시는 자연과 인간의 교차로로서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다리가 분리를 극복하는 물건이라면, 교차로에서는 통제가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예컨대, 두 <파라메트릭>(2025)에서 이은우가 재료로 다루는 폴리우레탄은 부풀어 오르는 특성이 있다. 튜브에서 형태를 캐스팅하고 3분 만에 굳는 과정에서 작가는 물성을 통제하기 어렵고, 캐스팅된 형태는 원본을 벗어난다. <프랙탈>(2025)은 멀리서 보면 대리석처럼 보이는 작품이다. 물감을 여러 번 덮어 층을 만든 후 기계로 파서 깊이를 만든 이 작품에서, 관람객은 나이테처럼 드러난 시간의 겹을 공간적 깊이에 보게 된다. 이를 단순히 인공물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미래로 향하는 길을 가다가, 먼 미래의 인류가 2025년의 인간을 고고학적으로 탐구할 때 조사하는 자료가 될지도 모른다. 동굴 벽화를 보고 고대인의 삶을 유추하고 연구하듯이, <프랙탈>의 패턴 속에 노출된 층을 보고 2025년에 살았던 인간을 떠올릴 수도 있다. 그때 작품은 인공적일까, 아니면 자연에 속할까—둘 사이에서 오가는 시선이 있을 것이다. 마치 동물이 없는 생태통로를 보고 사라진 동물을 떠올리는 듯이, 미래의 인류는 우리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착종의 형태를 시각적으로 전달해 주는 <사이의 공간>(2025)에 들어가기 전에, 허내훈의  시리즈(2025)가 걸려 있다. 위성사진을 왜곡시킨 이 작품에서 이미지는 추상적으로 변형되었다. 구체적인 대상이 달라 보인다는 점 못지않게, 이 작품에서 중요한 점은 소용돌이의 형상이다. 소용돌이는 힘의 방향이 중앙으로 빨려 들듯 그려지지만, 길을 따라가듯 시선으로 따라가면 오히려 갈 길을 잃게 된다. 전시 제목이 말하는 “아마도 이쪽입니다, 고라니씨.”는 정확한 길을 같이 찾아주는 말처럼 들리는 동시에, 잘못된 길로 가도록 현혹하는 말처럼 들린다. 현기증을 일으키는 소용돌이 모양은 도로표지판과 정반대의 성격이며, 이는 <사이의 공간>에서 지나가기 쉽지 않은 구조와도 맞물린다. <사이의 공간>을 지나, 관객은 <잘못된 곳의 생존자들>(2025)을 보게 된다. 제대로 활용되어 있지 않은 생태통로에 어떤 동물이 사는지 떠올리는 듯이, 영상에는 동물이 지나가는 모습이 순간적으로 포착된다. 설치 방식은 엿보는 시선을 유도하다가도, 정면보다 시야각이 좁은 화면 앞에서—심지어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는—우리 또한 금방 지나가 버린다. 아주 순간적으로 나타나 화면을 가로질러 사라지는 동물들은 인간(관객)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관객인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동물에게 행복한 것일까. 

생태통로의 사례처럼, 인간의 몰이해와 무관심이 야기한 결말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동물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이러한 상상은 <잘못된 곳의 생존자들>의 동물들이 AI를 활용하여 제작된 사실과 겹친다. 현실과 상관없이, 인간은 자연을 만들게 되었다. 푸른 장미의 색을 다시 벗기는 <장미 2025: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에 대하여>(2025)와 <사향>처럼, 자연물은 인간의 상상에 힘입어 상품이 되기도 한다. AI가 연구에 사용되기도 하지만, 도처에 보이는 광고에서 훨씬 익숙한 것처럼, 인간의 기술은 욕구를 충족시키고 다른 욕구를 창출한다. 향수 원료로 사용되는 사향노루의 냄새는 이제는 대중적으로 유통된다. 인간이 개발하고 상품화하고 보급하는 과정 또한 하나의 길이라면, 이 ‘유통’의 과정 역시 교차적이다. 자연에서 살다가 멸종위기를 겪는 노루, 인기를 얻어 인공적으로 개발된 향기, 고급화와 대중화가 오가는 길은 일직선이 아니다. 짐멜은 당시 생각도 못 했겠지만, 도로—특히 고속도로는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 한 방향으로만 나아간다. 여기에는 방해되거나 부딪히는 요소가 제거되는데, 사실 길은 그러기만 하지 않는다. 짐멜이 말했듯이, 길은 분리와 통합의 운동성이 담기기 때문이다. 

추상적으로 들릴지도 모르는 ‘미래를 향한’ 길에 인간도 동물도 서 있다면, 우리는 미술작품을 통해서 나아갈 길을 구체적으로 고민할 수 있다. 《아마도 이쪽입니다, 고라니씨.》는 삶과 죽음, 인간과 자연, 현재와 미래, 허구와 현실이 만나는 교차로에 우리를 서도록 한다. 목적성을 내세운 인간 중심적 사고를 벗어나는 기회, 그것은 이은우와 허내훈이 도로 위에서 생태통로를 우연히 발견한 것처럼, 길에서도 찾을 수 있다. 길은 분리와 통합의 운동성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그 역동성 안에서 우리가 걸어가는 길은 다시 그려나갈 수 있을 것이다. 


[1] ゲオルク・ジンメル, 酒田健一(訳), 『橋と扉』, 白水社, 2020, p. 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