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을 소진시키지 않는 고고학자의 면면 (2024)
김현주 (독립큐레이터)
해가 정격 포즈로 하늘을 완전 점령하고 나면
이 발굴지를 덥석 집어 제 식민지를 건설합니다¹
마치 고고학자처럼 조밀한 운신. 그는 덩어리져 살아내지 않고 “사방으로 줄자를 두르고 칼로 잘라낸 듯 땅을 나누고”² 이처럼 〈수직, 수평, 그리고 높이〉(2024)에 소임을 다한다. 언뜻 보면 화가인가 싶을 성도 한데 아주 중요하지는 않을 수 있겠지만 조소로부터 출발하긴 했다. 가시적 자취로 〈파묻힌 개〉(2024) 정도가 그 단서다.
사실 취향으로는《형용모순》과 같은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빅 텐트 같이 느껴진달까. 전시를 보던 당시에는 수사 어구 정도로만 생각하고 둘러봤는데 시간이 지난 후 작품들을 복기해보니 “상반된 개념들의 충돌을 경험하며, 결국 그 갈등과 경계지점에 놓이게 된다”³는 언급에 동의하기에 이르렀다. 당장 전시를 보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까 싶게 추상적인 문장으로 구성된 이은우의 노트는 장르로 구별되는 회화, 조각, 사진에 대한 부정과, 조형의 기초인 색에 대한 부정과, 완성이나 의미에 대한 회의와, 생사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부정과 회의와 질문에 대한 답이 이 전시냐고 한다면 경제적으로 수렴되고 있다고 쉽게 말하진 못하겠다. 그러나 그를 발굴지를 제 식민지로 건설하는 고고학자로 상정한다면? 이 가정을 그를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로 둔다. 덧붙여 인터뷰 영상에서 본 시간에 대한 그의 강조가 마치 하나의 점처럼 찍혔다. 그로부터 작고한 시인을 떠올렸는데, 허수경은 시인이자, 독일 뮌스터에서 고대동방고고학을 전공한 고고학자이기도 하다. “사방으로 줄자를 두르고 칼로 잘라낸 듯 땅을 나누고” 다음의 구절을 마저 옮겨 본다.
(기록을 위해 만들어진 이 기술은 귀여워요. 감쪽같이 당신이 이 지구에 있었던 마지막 자리를 남북경위도 숫자로 딱 매겨내지요, 그리고 제가 지금 기록하고 있는 격자 안에 든 작은 발굴지 지도를 좀 보세요. 그 안에 점을 찍으면 그 점이 당신의 마지막 지상의 자리가 됩니다)⁴
옛 이를 부르는 발굴이라는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시간이 굽이지고, 또 미래에 궁금증을 던지는 질문을 통해 점과 점은 연이어져 미처 못한 과업을 미래로 내던진다. 그는, 나는, 우리는 현재의 점이자 과거의 점을 발굴하고 또 미래가 발굴해낼 점일 뿐. 그리 대단하지 않지만 단순하지도 않게 오늘을 살아간다.
이제 그가 찍은 점과, 그가 긋는 선들을 살펴보자. 이은우의 〈미래로부터의 요청〉(2024)은 청주 용암초등학교 3–4학년 12명의 인터뷰 영상이다. 영상은 큰 전시실 한 벽면을 가득 채워 프로젝션 되고 있는데 프로젝션 면만큼 영상이 리플렉션되는 바닥면까지를 감각한다면 《형용모순》에서 이 작품이 지닌 무게는 제법 무겁다. 이은우가 던진 질문은 다음과 같다. 미래 사회를 위해서 어른들이 해줘야 할 것은? 그리고 어린이들을 어떻게 봐줬으면 하는지, 마지막으로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세 개의 질문에 대해 학생들은 각기 답한다. 학생들은 어느 정도 짐작 가능한 답과 또 예상과 미묘하게 갈라지는 답을 하는데 답의 내용보다 종종 침묵의 순간과 인터뷰어를 벗어나는 시선이 차지하는 순간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협업 요청에 2주간에 걸쳐 자발적으로 한 명씩 미술창작스튜디오에 찾아와 카메라 앞에 앉았을 친구들을 생각하면 마냥 귀엽다. 이곳까지 걸어오는 길목에서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가, 내 대답이 작품이 된다는 것에 어떤 기대를 품었을까. 그래서 이 친구들은 전시를 보았을까. 소소한 물음이 드는 가운데 영상 형식과 내용에 잠시 가려진 시계 소리를 파헤쳐본다.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는 본디 초침보다 재생 속도를 늦추어 삽입됐다. 영상과 시계 소리가 조응하는 가운데 그의 의도를 짐작해 본다. (미래) 과제를 묻고 답하는 현재 시제는 반드시 선형적 시간의 논리로 과거–현재–미래의 싱크를 맞춰야만 하는가. 아니다. 회복, 아니 고차원적 회복은 형식 논리에 제압될 수 없다. 따라서 〈미래로부터의 요청〉은 어린이들의 순수를 나열한 것에 그치지 않고 논리적 모순이 실재 속에 존재한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재적 대립을 소진시키지 않으려는 노력을 요구한다. 바닥까지 떨구어진 4개의 조명기구가 설치된 〈빛 아닌 빛〉(2024)도 별도의 지분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기능 아닌 기능으로 공간에 자리했다.
〈미래로부터의 요청〉에 성큼 진입했지만 돌이켜보면 전시장 초입의 〈프랙탈 No.2〉(2024)는 《형용모순》의 이정표로 기능했다는 사후적 판단에 닿았다. 이 작품은 양 갈래로 나뉘는 진입 초입에서 미래와, 시제 상에서 과거–현재로의 두 방향 사이에서 이은우가 잘라낸 땅을 가늠하게 만든다.〈프랙탈 No.2〉와 〈수직, 수평, 그리고 높이〉는 제작 기법상 동일한 방식을 취한다. 노동집약적으로 보이는 두 작품은 아크릴과 모델링 페이스트를 사용하여 레이어를 쌓아나가면서도 또 깎아내는, 두 관성을 상호 배반하는 방식으로 결과물이 도출됐다. 제작 공정에 공들인 시간을 묻는 건 그에게 공허할 따름이다. 물성이 지층을 이루지만 지층이 그러하듯 결과적인 적층에는 끊임없는 풍화와 침식이 반드시 동반된다. 이에 대한 친절한 지표가 〈수직, 수평, 그리고 높이〉 아래 흩어져있는 깎인 안료다. 외연은 평면이지만 소거법을 따르다 보면 닿는 곳은 회화도 조각도 아닌 무엇이 되고 만다. 이쯤에서 드는 생각은, 그가 단일성으로의 추상을 극도로 기피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취하는 논리는 형식 논리가 아닌 양상 논리에 가까워 보인다. 따라서 그로부터 참이자 진실의 필연성을 좇지 않는 대신 모순과 대립을 받아 안으려는 부단한 시도를 찾게 된다. 두 작품 사이에 자리한 〈소리〉(2024)는 피필로티 리스트의 작업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마치 숨구멍처럼 전시를 이완시킨다. 도시에서 채집한 소리를 PVC 배관에 매복시켜 그의 표현대로라면 ‘장난’에 가깝게 구현시켜 놓은 작품으로 영화에서 스팅어(stinger)처럼 발견하는 이들에게만 유효한 보너스트랙이 됐다.
앞서 그를 태도에 있어서 고고학자로 상정했는데 〈뤼데스하임〉과 〈하늘〉은 2019년 제작된 작업을 2024년 복원하여 구현에 있어서도 실제 복원가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그는 팬데믹 시기 활로가 막혔을 때 종종 사진을 찍으러 다녔다고 한다⁵ 이 두 작품은 사진의 재처리에 가깝게 보이지만 ‘사진’의 재처리보다 사진의 ‘재처리’에 방점이 찍힌다. 필요에 의해 사진이 선택됐지만 그에게는 보이는 세계를 분할해서 이미지 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싶은 열망이 더 앞섰다. 두 작품은 100장으로 분할되어 있지만 50장이 될 수도, 200장이 될 수도 있다. 100장의 이미지는 좌우상하로 연접해서 뤼데스하임이라는 독일 소도시의 어느 풍경과, 나무와 하늘 풍경을 구상 이미지로 전하지만 그렇게 구성된 표피적 이미지 전달은 작품의 취지가 아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접근법이 작동하는데 사진에서 “RGB 컬러가 쌓이게 되면서 모든 색상이 병치되어 이미지가 형성”된다는 구조와, “우리가 겉으로 보고 있는 이미지를 세부적으로 보게 되면 서로 엉겨 붙어 있는 모습”⁶이라는 전제가 그것이다. 자세히 보면 화학 제품으로 사진을 녹여 형상이 추상화되고 있는데 추상과 구상의 이분법은 중요하지 않다. 구상과 추상 사이의 넘나듦을 쉽사리 총체화하지 않는 방식은 그를 고고학자의 발굴 태도에 빗대어 말하는 이유다.
에이디 2002년 팔월 새벽 여섯 시 삽으로 정방형으로 땅을 자른다. 비씨 2000년경 토기 파편들, 돼지뼈, 염소뼈가 나오고 진흙으로 만든 개가 나오고 바퀴가 나오고 드디어는 한 모퉁이만 남은 다진 바닥이 나온다 발굴은 중단되고 청소가 시작된다 그 바닥은 얼마나 남았을까, 이 미터 곱하기 일 미터? 높이를 재고 방위를 재고 바닥을 모눈종이에 그려 넣는다 이 미터 곱하기 일 미터의 비씨 2000년경, 사진을 찍고 난 뒤 바닥을 다시 삽으로 판다⁷
정방형 땅을 잘라 높이를 재고 방위를 재고 이를 모눈종이에 그려 점을 찍어 마치 “당신의 마지막 지상의 자리”⁸를 현시하는 과업을 그는 묵묵히 해내고 있다.
이은우는 전시 작품들을 거론하며 이것은 사진을 뽑고 지운다, 저것은 쌓고 깎는다 등으로 간단한 듯 설명했지만 개념을 계획적으로 구현해내는 과정에서의 치밀함을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는 〈칠하는 사람〉(2024)을 들 수 있겠다. 〈칠하는 사람〉은 14개의 영상 소스를 편집하여 9개의 모니터를 통해 무한 반복하고 있는데 각각의 화면은 화면 내 분할과, 시간순과 역시간순이 재각각이며 또 행위 시점도 다양하게 재생되고 있다. 아마도 한 번에 수행되었을 칠하는 행위를 미분하고 또 적분하는 방법론은 전시 전반의 작품에서도 공유하는 것인데 바로 이 같은 접근법이 내가 그를 덩어리져 살아내지 않고 있다고 말할 근거가 된다. 그에게서 보이는 조밀한 운신은 하나의 큰 덩어리(whole)에 기필코 도달하지 않으려는 각오이지 않을까. “어떤 실재적 대상도 다른 대상과의 대립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을 소진하지 않으며, 그 대립과는 무관한 자기 자신의 실재성을 갖고 있기 때문”⁹이라는 실재적 대립에 대한 정치철학자들의 언명이 《형용모순》에서의 (실재적) 대립을 그 자체로 인정하는 이은우로부터 떠올린다.
부연: 발굴지를 식민지로 건설하는 고고학자의 위치에 그를 두면서도 식민지라는 단어가, 혹은 단어 이상의 실재적 고통을 그에게 전가하는 것은 아닐까 조심스럽다. 그러나 이 예속이 나로부터 의미를 발굴하고 구성해내는 (예술의) 잠재적인 가상에 근거하고 있기에 이런 상정이 그에게 큰 결례가 아니기를 바란다.
주석
¹ 허수경, 「새벽 발굴」,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문학과지성사, 2005, p. 44.
² 위의 글.
³ 이은우 개인전 《형용모순》(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2024) 리플렛에서 발췌한다.
⁴ 허수경, pp. 44–45.
⁵ 이은우는 사진을 본격적으로 작업에 적용한 시기를 2014년부터로 상정한다. 사진을 기법적으로 접근하기보다 조각가의 입장에서 세상을 이루고 있는 것들을 sculpture와 plastic 사이의 차이로 접근해 보고자 했다고 밝힌다. 2024년 9월 26일 이은우와의 대화에서 발췌한다.
⁶ 두 가지 작동법은 2024년 9월 26일 이은우와의 대화에서 발췌한다.
⁷ 허수경, 「시간언덕」,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문학과지성사, 2005, p. 70.
⁸ 허수경, p. 45.
⁹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샹탈 무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이승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3, pp. 223-224.